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문단 편집) == 참담한 결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19A8D52-E852-4F58-9DC8-B53FDA41D303.jpg|width=100%]]}}}|| || 아드와 전투에서 승리 후 싱글벙글 웃으며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오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실 근위대와 오로모족 기병.[* 이 기병은 에티오피아의 실세인 암하라족과는 다른 민족인 [[오로모인]]으로 구성된 황실 근위대 기병으로, 이탈리아군은 이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관습에 따라 [[고자되기|성기를 자른다는]] 풍문(외부인인 이탈리아군은 황실 반역죄에 해당하지 않아 곱게 돌려보냈지만 자국민 취급을 받았던 에리트레아인은 황실 반역죄로 [[궁형|진짜 잘렸다.]](...) 어느 정도 사실이 포함된 헛소문인 셈)을 믿어 항복하든 말든 [[내가 고자라니|여러 의미에서의 죽는다는 공포]] ~~[[포로는 필요없다|이탈리아의 백기가 안 통하다니!]]~~ 에 질린 이탈리아 병사의 단말마가 [[멘붕|"갈라 기병... 갈라 기병... 공포... 공포...!!"]]였다고 하며(서양에서 오로모인을 부르는 명칭이 갈라인이다.) 이 용감한 황실 근위대는 [[6.25 전쟁]]에도 참전하여 [[만인지적|253전 253승]]의 엄청난 [[인간병기]]급 전적을 올렸다.]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화려한 장식 때문에 갈라 기병, 즉 축제 기병이라고 불렸다. 오로모 기병대는 이런 멸칭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고자로 만든다는 소문을 더 불쾌하게 생각한 듯하다. ~~[[과부제조기|고자제조기]]~~] || 아드와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역관광|대재앙]]이 되었다. 바라티에리 총독은 겨우 탈출하여 전장을 빠져나왔으나 휘하 여단장 3명 중 2명은 전사하고, 1명은 항복 후 포로로 잡혀 '''중간 지휘부가 소멸'''되었고 전체 병력 중 7천이 전사하고 3천이 포로로 잡혀 에리트레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단 7천 명 뿐이었다. 심지어 귀환한 사람들도 그 중 1,500명이 부상자였다. 황급히 전장을 빠져나오느라 전장에 방기된 중포 56문 전량과 소총 1만 1천여 정이 에티오피아측에 노획된 것은 덤. 이탈리아 왕국은 반격은 커녕 식민지 에리트레아 방어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에티오피아군의 피해는 전사 4천 명, 부상자 8천여 명이라서 작은것은 아니지만 사망자가 이탈리아 측이 더 많으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아드와 전투의 대참패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훗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동양의 섬나라 일본에게 패배한 것에도 비슷한 충격은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시도하고 있었고 유럽 열강들에게 최소한 '자기네들 흉내내는 지구 반대편의 동양 국가' 정도의 이미지는 자리잡혀 있었다. 아프리카와 다르게 동아시아는 한때는 잘나갔던 2류 국가들 취급받기도 했고..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고 수많은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인 끝에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였다. 당연히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인식도 바닥을 기었고 아프리카인에 대한 이미지도 '식민지에 사는 미개한 열등 민족'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아프리카 국가에게 지는 것은 당대 유럽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탈리아라는 나름 유럽에서 알려진 강국이 참패를 겪은 것도 모자라 전쟁에까지 져 버렸으니 열강들에게 엄청난 놀림감이 된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다. 아드와 전투의 패전 책임을 물어 바라티에리가 경질되었으나 모든 책임을 일개 총독에게 넘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시당초 무리한 공격을 요구한 건 본국의 정부였기에 본국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크리스피]] 내각도 패전 책임으로 일괄 사퇴한다. 더군다나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경계선까지 밀고 왔다는 사실에 로마는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메넬리크 2세는 더 이상 밀고 오지 않았다. 비록 아드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에티오피아 측의 피해도 컸고 제국 각지의 부족들은 방어를 위해 집결했을 뿐, 공세에는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물론 중앙군만으로도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부족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상황이라 자칫하면 내부 분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승리를 거둔 것도 어디까지나 방어측의 입장이었고 여기서 무너지면 국토가 유린당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낸 성과이며 공세는 이야기가 달랐다. 게다가 만일 에리트레아까지 공세를 벌일 경우 이탈리아에서 에티오피아에게 복수하자는 여론이 팽배해져 이탈리아 본국의 군대가 참전할 우려도 있었다. 아무리 에티오피아군이라 할지라도 본국의 이탈리아군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결국 영국·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여 양국은 1896년 10월 26일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했다. 이탈리아는 포로의 몸값으로 1천만 리라를 에티오피아에 지불했고 에티오피아 측에게 약 20㎢ 정도의 영토를 할양했으며 문제의 발단이 된 우찰레 조약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에티오피아 측도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 영토로 계속 인정하며 몸값을 받고 포로들을 돌려보내 주었다. 이탈리아가 가하던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메넬리크는 이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예전처럼 또 다른 정복전쟁을 벌였다.[* 사실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해서 그렇지, 에티오피아도 주변의 약소국이나 부족들 상대로는 어찌보면 그보다 더한 [[패권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원래 에티오피아의 영토는 오늘날의 서북부 지역에 불과했지만 메넬리크 2세가 사방팔방으로 정복전쟁을 펼치면서 다른 약소국을 병합하여 넓어진 것이다. 한때는 [[에리트레아]]를 병합하여 내륙국 신세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에리트레아가 도로 독립하여 내륙국이 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다른 열강들이 아프리카에서 신나게 재미를 보고 있을 때 이탈리아는 졸전 끝에 참패하여 '식민지 대륙' 소리 듣던 아프리카 국가에게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으니 실추된 명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아디스아바바 조약에 치욕이라고 반발하며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는 폭력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진압해야 했다. 에티오피아의 포로가 되었던 이탈리아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때 한국에서는 이게 와전되어 모든 이탈리아인 포로가 거세당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에 복무하다가 잡힌 에리트레아 아스카리 800명은 반역자로 취급되어 손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말이 형벌이지 중세 사회나 다름없던 당시 동아프리카에서는 손발 절단=노동력 상실='''죽음'''이었다. 사실상 천천히 죽는 [[사형]]을 당한 것이다.] 사실 바라티에리 입장에서는 맞는 말만 했는데 윗선에서 귀 막고 있어서 패배를 강요당한 상황이긴 했다. 몇 년 동안 '우리 병력 부족해! 보급품 줘! 쟤들은 현대식 군대도 있어!' 라고 외쳐 왔는데도 전투 패배 소식을 들은 총리의 대답이 '걔들은 창과 방패밖에 없는데 어떻게 졌어?' 였다. 이탈리아 수뇌부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무능함을 보여준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